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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순, 『밤이, 밤이, 밤이』, 현대문학, 2018

by 감상요정 2023.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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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밤이, 밤이
박상순 시집 『밤이, 밤이, 밤이』 무선 시집과 작가들의 친필사인이 담긴 한정판 양장세트 별도 발매 아트 컬래버레이션, 핀 라이브 등 다양한 특색들 반년간마다 새롭게 출간되는 〈현대문학 핀 시리즈〉의 2018년 상반기를 책임질 『현대문학 핀 시리즈 VOL. Ⅰ』의 시인들은 박상순, 이장욱, 이기성, 김경후, 유계영, 양안다 6인이다. 한국 시단의 든든한 허리를 이루는 중견부터 이제 막 첫 시집을 펴내는 신인에 이르기까지, 독자들은 『현대문학 핀 시리즈 VOL. Ⅰ』을 통해 현재 한국의 시의 현주소를 살피고 그 방향성을 짐작해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지면을 한꺼번에 만나게 되는 셈이다. 시리즈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박상순 시집 『밤이, 밤이, 밤이』는 시인이 직접 작업한 이미지들이 활자와 함께 자리해 시선을 끈다. 마치 회화적 구조를 이룬 한 권의 완결된 작품집을 연상케 할 만큼 예술적 성취를 보여주고 있는 이 시집은, 박상순 시인 특유의 경쾌한 어미 처리와 시어의 선정으로 시의 음악성까지 부각시키고 있다. 한마디로 박상순 시인이 고집하는 예술적 소신이 그대로 묻어난다. 『밤이, 밤이, 밤이』는 독특한 개성과 리듬감으로 이미 한국 시단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해온 박상순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으로, 2017년 〈미당문학상〉 수상작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을 포함한 30편의 시와 ‘카페’를 주제로 한 시론과 예술론을 이국 체험 속에 녹여낸 아름다운 에세이 [그의 카페]가 실려 있다. 과작寡作의 시인으로 지난해 13년 만에 네 번째 시집을 펴내 독자들의 폭발적 반응을 불러일으켰던 시인이 1년여 만에 펴낸 이번 시집은 그의 시에 갈증이 컸던 독자들에게는 무척이나 즐거운 소식임이 아닐 수 없다. ‘여섯 시인의 여섯 권 신작 소시집’이라는 새로운 콘셉트만큼이나 시집의 판형이나 구성에도 차별화된 특색을 갖췄다. 가로 104센티 세로 182센티의 판형은 보통의 시집보다 가로 폭을 좁히고 휴대성을 극대화해 말 그대로 독자들의 손안에 ‘시가 쏙 들어오는’ 사이즈로 제작되었다. 시편이 끝나고 나오는 오른쪽 면은 여백으로 남겨 시와 시 사이의 숨을 고를 수 있도록 가독성 또한 높였다. 관행처럼 되어 있던 시집의 해설이나 작가의 말 대신 20여 편의 시편과 함께 같은 테마로 한 에세이를 수록한 것 또한 주목할 만할 점이다. 이번 6인의 시인들은 ‘공간’이라는 공통된 테마 아래 ‘카페’ ‘동물원’ ‘박물관’ ‘매점’ ‘공장’ ‘극장’이라는 각각 다른 장소들을 택해 써 내려간 에세이들이 시집 말미에 수록되어 시인 한 명 한 명의 개성을 선명히 드러내주고 있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VOL. Ⅰ』은 시리즈 론칭을 기념하여 6인 시인의 낭독회 행사와 함께 독자들에게 특별한 순간을 선사한다. 500질 한정으로 발매되는 6인 시인의 친필사인과 메시지가 담긴 양장본 세트(전 6권)가 그것이다. 일반 무선 제본으로 제작되는 낱권 소시집과 동시에 출간된다.
저자
박상순
출판
현대문학
출판일
2018.03.05

 

별점 : ★★★

 

고독하지 않은 산책자의 목적 있는 산책

현대문학 핀시리즈 시인선 1번을 장식한 시인은 박상순이다. 사실 핀시리즈는 출간된 직후에 바로 접했었지만, 인생이 고달파서 읽어보기만 하고 생각을 따로 정리해본 적은 없었다. 지금은 해외에 정착한답시고 가지고 있었던 책들을 다 알라딘 중고서점에 팔아 넘겨버려서 없지만 양장본과 떡제본 판형을 따로 구매했을 정도로 애독자였던 시절이 있었다. 다른 출판사에서도 많은 시집이 출판되고 있지만 전공자였던 입장에서는 유명한 시인을 제외하고는 '문학과지성사', '민음사', '문학동네' 중에서 고르는 것이 안전한 선택일 때가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또 다른 좋은 선택지가 될 수 있는 현대문학 핀시리즈의 등장은 반가운 일이었다.

박상순, 『밤이, 밤이, 밤이』, 현대문학, 2018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30편 남짓한 시편으로 엮어지는 책이기에 시인의 최근 방향성을 도통 종잡기 어렵다는 것과 출판하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으로(다른 시집에 비해 수록 시편 수가 적으므로) 출판할 수 있어서인지 솔직히 말하면 밀도가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5년이 지난 지금도 꾸준히 새로운 번호가 출간되는 걸로 봐서는 나름대로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볼륨은 반으로 줄었는데 시집의 가격은 거의 비슷하다. 사실 다양성을 위해서, 시 한 편당 시인이 벌어들일 수 있는 기대수익의 조금이라도 유의미한 증가를 위해서라고 생각한다면 두 손 들고 반겨야 할 일이지만, 이 줄어들대로 줄어든 볼륨을 에세이 한 편으로 퉁치려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핀시리즈 시인선의 장점을 꼽아보라면 밀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시편들로 엮어진 경우가 많아 진입장벽이 낮은 경우가 있다는 점을 일단 말하고 싶다. 두 번째 장점이라면 오히려 시편이 30편 정도로 제한되고 있기 때문에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시도들이 관측된다는 점이다. 50편이나 60편이었다면 모든 시들을 실험시로 엮는다거나 시편들 제각각 각기 다른 시도들을 한다거나 하는 방식은 거의 일어날 수 없다. 쓰는데도 큰 힘이 소모되는 일일 뿐더러 읽는 독자도 기빨린다. 다른 좋은 표현이 있으면 좋겠는데 기빨린다. 그런데 이게 차라리 김안의 『미제레레』라던가 허연의 『불온한 검은 피』의 느낌으로 에너지가 넘쳐주면 좋겠는데 쓰는 사람만 즐거워 보이는 두꺼운 시집을 마주치면 읽기는 읽어야겠고, 다 읽을 자신은 없어지는 경우도 있는데 수록된 시편의 수가 절반이니 고통도 절반, 난이도도 절반이다.

 

박상순 답지 않게 친절한 시집

핀시리즈의 1번을 박상순이 장식하게 되어서 다행이고 또 기뻤다. 평소에도 좋아하던 시인이라 5년만이지만 또 2회독했다.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핀시리즈가 보여준 장점과 단점 중에 장점이 부각되는 시집이었다. 『슬픈 감자 200그램』이 출간되고 1년만에 바로 나오는 시집인 데다가 핀시리즈 특유의 단점 때문에 밀도가 다소 낮아보이는 것도 사실이었고, 『슬픈 감자 200그램』과 굳이 분리되어서 다른 시집으로 찾아온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박상순 시인이 하려는 시도가 조금은 선명해 보였다.

이번 주 들어서 『슬픈 감자 200그램』도 다시 읽어보는 중이지만 눈에 띄는 점이라면 서양미술사에서 자주 보였던 장면이나 사물을 끌고 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단어에게 뒤집어 씌우는 방식이다.

 


  호박씨 까먹었음. 달빛은 없음.

 

  오동통한 물오리, 붉은 부리 물오리, 가슴에 붉은

  점이 있는 통통하고 기름진 물오리와 나는

  호숫가에서······

  호박씨 까먹었음. 오동통한 물오리가 엉덩이로

  까주었음. 달콤하고 고소한, 꼭 그렇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말했음. 통통한 물오리가

  헤엄을 치며,

  내 발목을 그의 붉은 부리로 물고 호수의 한가운데로

  나아갔음. 호수의 한가운데서 나는 잠이 들었음.

  햇빛이 몽롱하게 쏟아지고 있었음.

 

  매끈한 물오리. 그렇지만 아랫배에 털이 없는

  물오리는 겨울밤에 만났음.

  눈이 펑펑 내렸음. 두꺼운 외투를 입은

  털 없는 물오리는, 나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내 앞에 쓰러졌음. 아직 작았던 나는

  겨울밤의 그 매끈한 물오리를 겨우 뒤집어서

  눈 때문에 흠뻑 젖은 그의 두꺼운 외투, 젖은 옷을

  벗겨서 바닥에 늘어놓았음. 창밖엔 눈 내리는 소리,

  바닥엔 젖은 옷들이 마르는 소리, 몽롱하게······

  울렸음.

 

  오동통한 붉은 부리 물오리는 언제나 늠름하게

  나아갔음. 그의 붉은 부리로 나를 이끌며 목소리 큰

  철물점 아저씨도, 소란스러운 생선가게 아줌마도,

  술 취한 듯 밀려오는 거리의 인파도,

  내 앞에서 다 헤치며 나아갔음. 매끈한 물오리,

  털 없는 그 물오리는 항상 두꺼운 외투를 입었지만

  사뿐사뿐 걸었음. 몽롱한 내 눈빛을 바라보며

  아른아른 흘러갔음.

 

  그러나······ 매끈한 물오리, 털 없는 그 물오리는

  사발사발, 삿싸발, 이상한 욕을 하고, 달에게도,

  별에게도 욕을 하고,

  밤이면 밤이라서, 비 오면 비 온다고,

  잠 오면 잠 온다고 마구 욕을 해댔음.

  오동통한 물오리는, 닭만 보면, 새만 보면, 발길질,

  허공에도 발길질. 다른 오리들을 만나면 물어뜯었음.

  날개 달린 것들만 보면 달려들어 싸움 걸었음. 하지만

  호숫가에 가면······ 내게 호박씨 까주었음.

  그 물오리(오동통한)와, 그 물오리(매끈한)와 나는,

  달도 없고 닭도 없는 별도 없고 밤도 없는,

  날개 달린 그 무엇도 없는 딴 세상을 찾을 마음은

  처음부터 없었음. 그저 나는,

  아직 어려, 난 아직 너무 작아, 그렇게 생각하며

  그 물오리와 그 물오리의 곁에서, 말없이 얼쩡거렸음.

 

  마침내,

  호박씨 가득한 호숫가로 가는 환한 길을 다 알고 난 뒤.

  털 없는 물오리의 두툼하고 따뜻한 외투가

  내 몸에 맞을 만큼 자란 뒤에 나는,

  그 물오리와, 그 물오리를, 흐릿한 달빛이

  어슬렁거리는

  숲속에······ 밀어 넣었음.

 

  마침내, 사발사발, 삿싸발, 이상한

  욕을 하며 나는······

  호박씨 까먹었음. 달빛은 없음.


박상순, 『밤이, 밤이, 밤이』, 현대문학, 2018

배신당하다

 

표제작을 놔두고, 제목에 숫자가 붙고 삽화가 딸린 시편들을 놔두고, 등단한 이후로 박상순 시인이 주구장창 선보이는 '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를 놔두고 굳이, 굳이, 「호박씨 까먹었음. 달빛은 없음.」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시의 전문이 처음부터 작정하고 시집의 판형에 맞춰서 맞춤설계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해당 시편은 첫행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2줄이 되는 경우가 없다. 아슬아슬하게 다음 줄로 넘어갈 때쯤 능청스럽게 행갈이가 되어 있으며, 시의 제목이기도 한 '호박씨 까먹었음. 달빛은 없음.' 부분은 '욕을 하며 나는'에서 잘려서 다음페이지로 넘어가 마무리된다. 4페이지를 꽉 채워 장악해놓고 마지막 페이지는 지독한 여운을 남겨놓고 끝난다. 여백의 미라고 넘겨짚자니 박상순 시인은 동양화가 아니라 회화과 출신이다.

앞에서 쌓아올린 이미지들을 전혀 상상도 못했던 단어가 뒤집어 쓴다거나, 분위기를 형성하다가 엉뚱한 상황의 묘사가 이어지는 것은 '반전'이라는 단어로 담아내기에는 결이 다른 것 같다. 그리고 현재진행형인지는 모르겠지만 해당 시편의 말투는 '네이트 판'을 비롯해 인터넷 커뮤니티 몇몇 곳에서 꽤 유행했던 형태의 '음슴체'인 것으로 의심된다. 왜 개조체나 '-음 종결체'가 아니라 하필 '커뮤니티에서 유행했던 음슴체 형태'라고 꼬집어 말하냐면 시어에 시적 화자로서의 '나'의 존재가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데다 『슬픈 감자 200그램』에서는 아예 대놓고 '돋는다'라는 표현이 등장하며, 「내 봄날은 고독하겠음」의 경우에도 사실 적시나 정보 전달을 위한 축약형이라기 보다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썰을 푸는 사람의 말투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해보이기 때문에 해당 시편에서도 그런 느낌으로 쓰였다는 의혹을 덜어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고 오동통한 물오리가 엉덩이로 호박씨를 까주는 다소 납득하기 어렵고, 당황스럽고, 받아들이기 싫은(받아들이기 어려운 게 아니라 싫은 거다) 이 이미지는 더 이상 아무도 썰을 풀 때 음슴체를 쓰는 세대가 남지 않게 되는 시대가 도래해도 그 자리에 그대로, 지금 이 느낌 이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김은은 선생님은 바빠요

 

 

  김은은 선생님은 우리 선생님

  선생님 어깨에서 갑자기 장미꽃 피고

  발밑에서 뾰족한 풀이 돋고, 비바람 불고

  머리에 뿔이 나도, 김은은 선생님은

  나의 선생님.

 

  내가 찾아가면, 언제나 내 말 들어줄

  내 선생님.

  끝까지 내 맘 헤아려줄

  내 국어 선생님.

 

  그런데, 오늘은 아파서 학교에 못 오셨네요.

  내가 너무 괴롭혔나?

  내일 다시 오시면, 선생님, 선생님.

  그렇게만 속으로, 가만히 부를 거예요.

 

  그런데 다음날,

  지지난번 학교의 졸업생들이 찾아와서

  나의 김은은 선생님을 빼앗아 갔어요.

  내일 다시 학교 가면 나는

  점심시간 학교 식당에서도, 쉬는 시간

  교무실에 가서도 나의 김은은 선생님 옆에 앉아

  내 말 들어달라고 꼭 붙어 있을 거예요.

 

  그래서 김은은 선생님은 내일 바빠요.

  김은은은은은은은은은. 이렇게 바쁠 거예요.

  교장 선생님이 찾아도, 목소리 큰 학부모가 찾아와서

  왕왕거려도, 머리가 아주 큰

  하마가 찾아와서 간지럼 태워도

  내가 그 옆에 꼭 붙어 있을 거예요.

 

  그래도 조금만 참으세요.

  오후 4시가 되면 집에 갈게요.

  혼자 갈게요.

 


박상순, 『밤이, 밤이, 밤이』, 현대문학, 2018

익숙한 단어들의 낯선 사용법

금(금) 자를 한자로 쓰면 金이고 성씨로 읽을 때에는 김이 된다. 김은은 선생님은 김씨 성이 금과 같은 한자를 쓴다는 데에서 출발하는 말장난일 수도 있지만, 해당 시편에서 독특한 장면을 연출해내고야 만다. 짧게 끊어지는 '은'의 발음이 연속되는 행은 정말로 발음 하나만으로 바쁜 이미지를 자아낸다. 그뿐만 아니라, 장면과 어울리지 않는 낯선 시어의 등장은 박상순의 작품에서 낯선 시도도 아니고 여태 해왔던 방식으로써의 시쓰기일 뿐이지만, 해당 시에서는 초등학생 쯤 되는 화자의 동심어린 몽상 정도로 읽혀버린다. 마치 여태까지 시도해왔던 것들이 예술영화나 회화적 기법을 빌려와 시를 쓴 것이 아니라 동심을 가지고 시를 썼다고 설득하려는 듯한 이 시는 오히려 너무 친절한 척 굴기 때문에 의심스럽다.

빨리 신작 시집을 통해 시인이 보여주고자 했던 방향성을 확인하고 싶지만 2017년부터 18년까지 몰아치는 폭풍우처럼 활동을 하다가 신작 소식이 들리지 않고 있다. 예술적 기법을 위해 동심의 느낌을 「김은은 선생님은 바빠요」에 끌어쓴 것인지 동심을 구현하기 위해 썼을 뿐인데 예술적 기법으로 내가 오독했을 뿐인지 다시금 확인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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