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점 : ★★☆
한 편 단위로는 나쁘지 않으나 시집 한 권이 주는 만큼의 만족을 기대하기엔 분량이 부족하다.

예대 재학 중에 구매했지만
구매는 5년 전에 책이 출판되자 마자 했다. 그 당시의 나는 신해욱, 이수명 같은 미니멀리즘의 끝을 달리는 시인들을 좋아했다. 시는 어느 쪽으로든 극에 달하는 순간 이루어진다고 어디선가 또 쓸데없는 걸 배우고는 아 그렇구나, 그런데 또 심보선 시인의 시를 한 편 읽어보니 미니멀하게 쓰는 것 같구나 오해를 했다. 때마침 그 시기에 위트 앤 시니컬이라는 시집 전문 서점에서 낭독회를 위한 시집을 한정판매 하는 것처럼 판매를 해서 나도 또 지갑을 열었었다. 어디에 발표된 적 없거나 앞으로도 세상에 나오지 않을 시들을 엮어서 발표하는데 그걸 또 시집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일정 수량 판매하고 나서는 더 안 팔겠다고 마케팅을 해서 사야만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안 읽고 방치하다가 졸업을 했다. 몇 해가 지나 유럽 땅을 밟게 되는 날까지 전혀 열어보지를 않았다. 나는 그 동안 먹고 살기 바빴고 유학 비용을 모아 빨리 유학생활을 시작하고 끝내고 취업까지 하고 싶었기 때문에 일도 공부도 배로 하던 시절이었다. 이제는 또 지역을 바꿔 이사하게 되었다. 당장 열흘 후면 바다를 건너 이사를 간다. 정착해서 살다가 그 나라에서 이사를 가는 거라면 몰라도, 정착할 생각이 없는 상태인 사람의 짐은 별 것 없다. 에어컨, 선풍기는 당연히 없다. 아무리 그런 짐이 없다지만 둘이 같이 살다보니 짐 무게를 합치면 100킬로그램은 거뜬히 넘는다. 이사를 갈 때 제일 미련이 많이 남으면서도 무게를 쉽게 줄일 수 있는 물건은 책과 옷인 것 같다.

이삿짐 정리를 버텨낸 책
해외생활을 하면서 아직은 옷에 돈 쓰는 것이 아까워서 나중에 대학생활 끝나고 취업하면 그때부터 예쁜 옷을 사입자 생각했다. 기본적으로 내가 영국생활 하면서 입었던 옷들은 최소한 5년 정도 입었던 옷들이라 골라서 반 정도 솎아냈다. 책도 내 손필기가 남아있어서 미련은 남았지만, 지금 B2에서 C1 사이임에도 영어회화 초보용 교재가 많았다. 한국에 있을 때 여기저기서 받아서 감사히 잘 읽은 책인데, 여기서 딱히 물려줄 사람도 없고 내 레벨과는 맞지 않아서 버리기로 했다.
책을 거의 절반 이상을 긁어다 버렸는데 시집은 유독 미련이 많이 남는 것 같다. 막상 내가 예대 다닐 때 사인을 받았던 책만 손에 남겨놓고 다 버리자 싶어도 손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책을 살 때 썼던 돈, 물건에 녹아들어 있는 내 시간, 왠지 내 추억거리 하나를 버리는 느낌 때문에 버리기 힘들었다.

느낀점
시집 구성이 신선했다. 녹색 소책자가 본문 같고 흰색으로 크게 프린팅된 종이가 낭독을 위한 독본 낱장 인쇄로 보였다. 구성은 어떻게 보면 알차고 또 꽉찼다 싶은 구성인데, 사실상 본문은 문학과지성사 시집 평균 분량 기준으로 놓고 보면 절반 분량도 안 되는 것 같다. 그것과는 별개로 대부분의 시편들이 미니멀과는 거리가 멀다. 사실 심보선 시인이 미니멀리스트가 아니라는 건 다른 시집을 읽었을 때 이미 느꼈던 점이다. 황유원 시인보다야 덜하지만 미니멀을 주로 선호해왔던 내 입장에서는 황유원이나 심보선이나 시집을 읽을 때 '와... 어떻게 이렇게 말을 많이 하지...' 생각하게 만드는 시인들이었다.
이번에 런던을 떠나기 전에 만날 사람이 있어 브라이튼에 다녀왔다. 반 년 정도 같이 일하다가 타지점으로 발령된 사람이었는데, 떠나기 전에 얼굴 한 번쯤 보기로 했다. 기차로는 왕복 2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인데 게임은 길게 안 하는 성격이고, 음악으로만 2시간을 채우기엔 음악도 오랫동안 듣는 성격이 아닌 나는, 이 시집을 들고 갔다. 내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해서 흰 종이는 일회성 낭독회에 왔다는 기분으로 다 읽으면 한 편씩 버리고, 녹색 책자는 소장하기로 했다. 그냥 한 권의 책으로 판매해도 될 거를 굳이 패키징을 이렇게 해서 판매하는 데에는 이유가 다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 책을 사서 읽은 독자 중 몇 명은 나와 같은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불완전해서 더 완전해 보이는 시집
텍스트도 한 권의 완결된 구성보다는 조금 날것의 느낌이 난다. 정제되고 최후의 순간까지 퇴고했지만 그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든 시집보다는 조금이나마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시도였다. 내가 받은 인쇄본만 그런 걸수도 있는데, 두 세 페이지 정도가 인쇄 불량이라 몇몇 글자가 희미하게 찍혀있었다. 오타도 있었다. 낭독을 위한 시집이라는 관점으로 이 시집을 바라보니 최종퇴고가 이루어지기 전의 작업물을 엿본 기분이라 오히려 재밌었다.
표제작인 「내가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면」의 마지막 연이 이 불완전한 구성을 가진 시집의 완전한 원투펀치라 생각한다. 「여기 있다」에서는 독자가 생각할 법한 시인의 모습과 시인 본인이 생각하는 시인의 모습을 대조시키면서 유머러스하게 끝맺고 있다. 시인이라는 존재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의미를 부여하지만 사실 머릿속은 이렇다는 식으로 끝맺는 방식인데, 중년의 시인이 썼다고 하기에는 조금은 귀여운 방식의 표현이었다고 생각한다. 표현은 귀여운데 또 왜 하필 투구벌레일까. 투구벌레에서는 세대 차이를 느끼고, 표현에서는 내 또래처럼 보여서 친근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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