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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문 베이직, 에센셜, 마스터 별책해설집

by 감상요정 2023.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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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문 기본 별책해설집

평생 한국에 살 줄 알았지 나는

인천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녔다. 12년을 같은 동네에서 살면서 생활반경도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았다. 도심지에서 사는 것만큼 놀거리가 많지는 않았지만, 세상 물정 전혀 모르던 내가 놀기에는 적당한 곳이었다. 노래방, PC방, 카페, 도서관 말고는 딱히 즐기는 취미도 없었다. 친구들이 가끔씩 너 참 재미없게 살았다고 놀리기도 하지만, 노는 데에 욕심은 없었다.

그러다가 예대에 진학했다. 예술을 전공하다보니 잘 노는 친구가 많았다. 세상에는 노래방이나 PC방 말고도 놀거리가 정말 정말 많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내가 한국에서 계속 살다가 예술계에 발을 뻗고 유명해져서 영어 쓸 일이 전혀 없을 줄 알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친척들로부터 도망쳐나왔다. 아예 한국을 벗어나 다른 나라에 정착을 했다. 그게 벌써 2년도 더 된 일이라는게 실감이 나지 않지만, 천일문은 한국에서 출국할 때 들고 온 책이었다.

 

한국에선 A2, 지금은 C1

사실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만 한국에서 출국하기 직전의 내 영어 레벨은 A2였다. 영어로 뭔가 대화를 해야 할 때, 머릿속에서 한국어로 번역을 해서 말하던 시기였다. 어학연수를 시작한 직후에 연애를 시작하고 영어가 빨리 늘기 시작했다. 더 대화하고 싶은 마음에 더 독하게 공부했고, 이후에 아예 정착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니 공부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대학원을 가고 싶기도 했는데, 예대를 졸업하고 나서 회계로 넘어가려니 프리마스터 과정을 끼고도 고통만 받을 것 같아서 결국 대학교를 가게 됐다. 선택지는 꽤나 다양했다. 파운데이션부터 시작할 수도 있었고, 1학년에 바로 입학하는 방법, IYO 코스를 거쳐 2학년으로 들어가는 방법, 3학년으로 탑업코스를 하는 방법이 있었다.

결국 나는 IYO를 선택했다. 어차피 나는 정착해서 같이 살기로 한 지역이 이미 정해져 있고, 최상위권 대학에 욕심이 있었으면 1년 동안 학비를 모으는 게 아니라 영혼까지 끌어모아서 대출받고 바로 공부를 시작했겠지. 곧 30대에 접어들어서 파운데이션 끼고 4년은 부담스럽고 1학년에 바로 입학하기는 조금 겁나고, 탑업을 하기에는 연관이 전혀 없는 전공이고. IYO 코스로 가면 해외에서 온 유학생들끼리 모여있는 수업이니까 괜찮을 것 같았다.

솔직히 쉬운 선택은 아니었다. 브리스톨, 엑시터, KCL을 도전해볼 수 있음에도 굳이 북아일랜드로 가겠다는 거니까. 물론 그 대학교도 정착해서 그 지역에서 일자리를 구하고 산다면 나쁜 선택은 아니다. 한국인이 유학을 할 때 학교의 네임벨류를 보는 건 유학생활이 끝나고 리턴을 할 수도 있다는 걸 고려하고 선택하는 거니까. 그리고 정착을 할 거여도 기왕이면 조금이라도 더 네임벨류가 높은 대학교에 가는 것이 좋은 거니까.

나는 리턴할 생각도 없는데다가 다른 대학을 선택해서 준비하면, 아일랜드 가족과 너무 멀어진다. 그리고 애인 친척 중에 회계사가 한 분 계신다. 조언이나 도움을 주신다는 분이 바로 옆에 있다는 점과 아일랜드 가족과 가깝다는 점, 어차피 나는 아일랜드 문화권에서 살 거라는 점(조금 먼 이야기지만 영국에서 시민권을 받고나서는 아일랜드 거주가 비자신청 없이 가능해서 더블린에서 지내보기로 했다) 때문에 북아일랜드를 갔다.

첫 단추로 아이엘츠 시험을 준비했다. 시험 준비는 다들 하는 그대로, 케임브리지에서 출시된 IELTS 공식 교재로도 공부했다. 그리고 천일문 세 단계를 모두 필사하고 오디오파일 듣고, 본문 속의 단어를 하나도 빠짐없이 외우려고 기를 썼다. 시험 전날까지 너무 몸을 혹사시킨 바람에 몸살에 걸려서 B2가 나왔지만, 정신이 반쯤 나가있는 상태에서 B2면 맨정신에서는 C1이 아닐까 싶어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테스트 받아본 결과 전체적으로는 B2+(......)가 나왔다. 스피킹과 리스닝은 조금 더 높게 나왔다. 여기까지 딱 1년 반이 걸렸다.

천일문 핵심 별책해설집

사실 천일비급만 있어도

천일비급이 말만 별책해설집이지 본문에서의 문장끊기나 영어문장들은 전부 수록되어있어서 1회독 후에는 본문이 딱히 필요가 없었다. 아이엘츠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쯤에는 천일문 본권이 필요가 없어서 진작에 정리해서 버렸다. 쎄듀 웹사이트에 들어가면 독학을 위한 자료들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기도 하고 아이엘츠 시험이 끝나고 이사를 갈 예정이었어서 가지고 있기는 부담스러웠다.

아이엘츠를 준비하는 중에도 두 번 정도 더 돌렸고, 오디오 파일도 열심히 들었다. 어디서 말을 꺼내면 잘 안 믿는 눈치기는 하지만, 고등학교 다닐 때 내 영어성적은 7등급이었다. 그야, 그때는 어렸고, 유명한 작가가 돼서 영어 공부할 필요 없이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사랑 그딴게 어딨냐, 사람 함부로 믿는 거 아니다, 인생 다 부질없다, 나는 평생 누군가와 함께 살 정도로 착한 사람이 아니다, 인생 까짓거 뭐 혼자 살다가 혼자 죽지, 를 외치던 고등학생은 자라서 외국인과 사랑에 빠져버렸다.

어학연수를 하고, 대학교도 다시 가게 되고, 직장에 한국인이라곤 없는 환경이어서 빨리 늘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 와중에 더 빨리 늘게 도와준 건 천일문이었다. 해외생활을 달랑 2년 해놓고 이런 말 하기는 민망하지만, 천일문의 예문들을 실제로 말할 일은 대부분 없어도(와! 영국! 빙하기 영향 덜 받아서 유럽대륙에 아직도 붙어있다! 이걸 일상생활에서 말할 기회가 '자연스럽게' 있을 리가 없으니) 문장 구조나 문법적 특성들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 이후에는 Grammar in Use의 도움도 받기는 했지만 그래머 인 유즈를 공부하기 전에 천일문을 공부한 게 신의 한 수 였다.

천일문 완성 별책해설집

또 개정했더라

내가 영국에 와서 공부한 천일문 버전이 또 다시 구판이 되었다. 고등학생 때, 공부를 안 하는 와중에도 보충수업 교재여서 돈 아까워서 샀던 푸르딩딩하고 거칠거칠하고, 영어 교재임에도 불구하고 천일문이 한자로 적혀있었던 그 책이 나온 이후로 세 번째 개정인 것 같다. 이제는 다시 천일문을 볼 일은 없겠지만, 지금도 여전히 감사하게 생각한다. 덕분에 영어 원서도 무리없이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아이엘츠 성적도 충분하게 나왔다. 만약 지금 성인인데 영어 공부를 천일문으로 다시 하는 걸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추천해주고 싶다.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10년 넘게 잘 팔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고, 나처럼 해외에서 잘, 이라고는 못하겠지만 정착해서 나름 살고 있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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