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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림, 『세상의 가시를 더듬다』, 문학동네, 2000 세상의 가시를 더듬다(문학동네시집 48) - 저자 서림 출판 문학동네 출판일 2000.11.15 별점 : ☆ 2023년에 살아남기 어려운 책 아무래도 20년도 전에 출간된 시집이라 그런지 전체적으로 낡다. 표현이 낡은 건 둘째치고, 요즘에 말해서는 매장당할 법한 표현들이 난무하다. 성적대상화가 심하고, 여성혐오적이며, 가부장적이다. 시편 중 일부는 십 수 년 전에 만난 여성을 기억하며 그 기억 속에서 육체를 떠올리는 회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이런 시편들이 어떻게 시집의 제목인 "세상의 가시를 더듬다"와 연결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본문 후에는 해설이 달려 있는데, 해설의 제목은 또 "충만한 말과 충만한 텅 빔의 미학"이다. 내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이것은 "충만한 말"이라기보다는 "단어만 많은 것".. 2023. 5. 27.
윤희상, 「고인돌과 함께 놀았다」 고인돌과 함께 놀았다 강화도에 갔다. 내가면 사무소에 들러 고인돌이 있는 곳을 물어보았더나, 가르쳐주었다. 선산에 갈 때처럼 고인돌이 있는 곳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참깨밭 한켠에 놓여 있는 고인돌 옆에 돗자리를 깔았다. 과일을 먹었다. 똥을 싸고, 오줌을 쌌다. 다섯 살 된 딸은 고인돌 위에서 춤을 추었다. 우리는 고인돌과 함께 놀았다. 나뭇잎 사이에서 해가 지고 있었다. 고인돌과 함께 놀 수 있을까 고인돌은 기본적으로 관광지가 될 수도 있고, 많이들 현장학습을 가는 장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점 말고도 고인돌은 오래된 것, 의미 있는 상징물, 옛것의 이미지를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다. 오랜 세월을 같은 자리에 있다보니 의미부여하는 것을 좋아하는 인간에게 의미를 부여받은 사물이 되는 것이다. 그런 고.. 2023. 3. 5.
윤희상, 「명절날, 객지의 방에서」 명절날, 객지의 방에서 구두를 방으로 가져다 놓는다. 방 안에서 문을 잠근다. 하루 종일 침대 위에 누워 있다. 책을 읽지 않고 본다. 밖에서 웃는 소리가 들린다. 들리는 것도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다. 소리나지 않게 마른 빵을 먹는다. 빈 맥주병 속에 오줌을 싼다. 병의 주둥이에서 하얀 버큼이 피어오른다. 자세히 바라보고 있으면, 한 송이 꽃이다. 꽃은 아름답다. 고독이란 무엇인가 우선 본문에서의 객지라는 단어를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사실 타지생활, 임시숙소 이런 단어는 지금도 많이 쓰지만 객지라는 단어는 비교적 드물게 쓰이는 듯하다. 낡은 단어라고 해도 크게 이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객지라는 것은 타지에서의 임시 거처 정도의 뜻을 가진 단어인데, 다분히 단어의 느낌이 복고풍이다. 옛날 시들을 읽.. 2023. 2. 26.
윤희상, 「빵은 나다」 빵은 나다 빵으로 여자를 만들었다 빵으로 남자를 만들었다 빵으로 사랑을 만들고, 빵으로 나를 만들었다 빵에서 해가 뜨고, 빵에서 해가 진다 나는 빵이다 빵은 나다 빵은 무엇인가 해당 시는 윤회상 시인의 『고인돌과 함께 놀았다』 시집의 중반부쯤 수록된 시이다. 평이한 이미지나 읽기 쉬운 단어들로 분위기를 이어나가다가 이 시편에서 갑자기 분위기가 돌변한다. 윤회상 시인은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고, 등단시인이니 시작법에 대해 딴지를 걸릴 만큼 허술한 사람은 아닐 터이다. 사실 「빵은 나다」는 어떻게 보면 재미있는 시라고 할 수 있다. 문예창작과에서 시를 전공할 때 하지 말라고 하는 것들이 전부 이루어진 시라고나 할까. 같은 단어의 과한 반복, 한 단어에서 파생되어서 암호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빵이.. 2023. 2.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