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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한 편 단위)

윤희상, 「빵은 나다」

by 감상요정 2023.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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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밤

 

  빵은 나다

 


  빵으로 여자를 만들었다
  빵으로 남자를 만들었다
  빵으로 사랑을 만들고,
  빵으로 나를 만들었다

  빵에서 해가 뜨고,
  빵에서 해가 진다

  나는 빵이다

  빵은 나다


빵은 무엇인가

해당 시는 윤회상 시인의 『고인돌과 함께 놀았다』 시집의 중반부쯤 수록된 시이다. 평이한 이미지나 읽기 쉬운 단어들로 분위기를 이어나가다가 이 시편에서 갑자기 분위기가 돌변한다. 윤회상 시인은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고, 등단시인이니 시작법에 대해 딴지를 걸릴 만큼 허술한 사람은 아닐 터이다.

사실 「빵은 나다」는 어떻게 보면 재미있는 시라고 할 수 있다. 문예창작과에서 시를 전공할 때 하지 말라고 하는 것들이 전부 이루어진 시라고나 할까. 같은 단어의 과한 반복, 한 단어에서 파생되어서 암호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빵이 핵심적인 단어임에도 이 단어를 시 내에서 책임지지 못한 상태로 나버린 끝맺음까지 모든 부분에서 정면적으로 이론적 측면에서의 시작법을 부정하는 시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겉모습만 놓고 평가를 하자면 창작할 때 하지 말라는 것들로만 시가 구성되어 있으니 실패로 오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오히려 시집 전체 수록시 중에서 이 시편이 눈에 잘 띄고, 다른 시들과 같이 읽으면 대략적인 맥락을 짚고 넘어갈 수 있으니 성공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겠으나

빵이 무엇인지는 시집에서 밝혀지지 않지만 여자와 남자를 만든 빵 속에서 사랑이 탄생하고 그 속에서 시적 화자 '나'가 탄생했으니 단어 그대로의 빵보다는 상징적인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정치적인 이념일 수도 있고, 꼭 하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빵으로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으며, 나를 만들었으니 '나'의 구성 성분의 상당한 부분을 빵이 채우고 있다는 선언. 그리고 빵으로 나를 만들었으니 나는 빵이고 빵이 곧 나다, 라는 선언은 마치 황지우 시인의 시집인 『나는 너다』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옛날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시집 구성과 '빵은 나다'라는 선언만 가지고 황지우의 시집과 분위기가 비슷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정치적인 성향의 시집이라기보다는 너무 외로운 나머지 '함부로 몸 맡기'다가 '얼떨결에 영혼도 맡'기는(「소라게」)  것에 차라리 가까울 것이다.

보통 때라면 가볍게 넘길 수도 있었던 시편이었지만, 유독 한 편의 구성만 시집 내에서 겉돌아서 단평으로 남겨본다. 약간은 이 시가 겉도는 것까지 의도된 것으로 읽혀서 분석하는 동안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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