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밤이, 밤이
밤이 일어선다. 밤이
걷는다. 길고 긴 글자들을 가진 밤이 걷는다. 황혼의 글자는 바다를 건넌다. 바람의 글자는 빗속에서 태어났다. 12월의 글자는 여행가방을 꾸렸고 월요일의 글자는 별을 좋아했다. 화요일의 글자는 거짓말을 했고 수요일의 글자는 딴생각을 했고, 금요일의 글자는 목요일의 글자 뒤에 숨었다. 3층에서 태어난 글자는 토요일의 글자와 사랑에 빠졌다. 봄의 글자는 4층에서 떨어졌고 여름의 글자는 맨발로 나타났고, 낙엽들의 글자는 첫눈을 기다렸다. 시계 속의 글자는 해바라기가 되고 싶었고, 병 속의 글자는 바퀴가 되고 싶었다. 창밖의 글자는 부엌이나 침대가 되고 싶었다. 길고 긴 어둠의 끈을 가진 밤의 글자들을 품은 밤이 일어선다. 밤이 걷는다. 내 얼굴 위로 밤이 걷는다.
밤이, 밤이,
무너진다. 밤이
주저앉는다. 큰 키의, 짙은 눈썹을 가진 밤이, 깊고 어두운 글자들을 품은 밤이 무너져 내린다. 밤의 글자들이 내 얼굴 위로 쏟아진다. 바다를 건너가던 황혼의 글자는 섬이 되었고, 빗속에서 태어난 글자는 우산을 두 개나 잃어버렸다. 12월의 글자는 발목을 다쳤고 월요일의 글자는 뒤로 자빠졌고, 거짓말을 하던 글자는 시계 속으로 들어갔고, 딴생각을 하던 글자는 금요일의 글자와 머리를 부딪쳤고, 목요일의 글자는 몸무게가 8킬로그램 늘었고 숨어 있던 글자는 길을 잃었고, 3층에서 태어난 글자는 손톱 끝이 갈라지기 시작했고 4층에서 떨어진 글자는 물속에 빠졌고, 토요일의 글자는 가을 내내 양파 껍질을 벗겼고, 맨발의 글자는 얼굴이 온통 빨개졌고, 첫눈을 기다리던 글자는 눈 속에 파묻혔고, 해바라기가 되고 싶은 글자는 낮게 흐르는 강물이 되었고, 바퀴가 된 글자는 창고 안에 던져졌고, 창밖의 글자는 아직도 거리에 서 있는, 깊고 어두운 밤의 글자들이, 밤이,
무너진다. 내 얼굴 위로 밤의 글자들이 쏟아져 내린다. 네가 어둠 속에 빠진 날, 밤이 너를 보고 놀란 날,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내 얼굴을 보고 휘청거리며 네가 캄캄한 벽 쪽으로 쓰러지던 날, 네가 내 앞에 주저앉던 날, 밤이.

시로 그림 그리기
밤이라는 단어는 명사다. 시간을 의미할 때가 많으며 이미지로 표현하라고 하면 대체로 어두컴컴한 하늘이나 달이 떠있거나 야경의 느낌으로 보여주려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해당 시편에서의 밤은 행동하는 주체이다. 수많은 글자들이 밤이라는 글자에 매달려 있다. 첫 연에서부터 '밤이 일어선다. 밤이 / 걷는다'라고 선언을 해버리는 바람에 시어에 등장하는 글자들은 밤의 몸에 매달려 있는 상황이지 않나, 생각할 여지를 준다. 옷에 매달려 있거나 밤의 나체에 매달려 있거나 그도 아니면 인간의 형체가 아닌 밤에 매달려 있거나. 밤이 걷는다는 표현은 의인화의 일환일 수도 있지만 굳이, 행동하는 주체로 여겨본다면 밤의 몸에 글자들이 끌려다니고 있는 상황일 수 있다.
이런 도입부를 지나 4연까지 읽다보면 '밤의 글자들이 내 얼굴 위로 쏟아진다'는 표현에 이르게 된다. 밤이 일종의 몸의 형태를 가지고 있더라도 밤은 아득할 정도로 거대하거나 인간보다는 큰 존재일 것이다. 아니면 시에서의 '내'가 누워있는 상황을 상정해볼 수 있겠다.
이 시에서의 '밤'이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렇게 가정하면 깊은 사유니 뭐니 하는 것까지 넘어갈 일 없이 너무 손쉽게 매듭이 지어지는 것 같아 마음에 내키지는 않지만, 박상순 시인이 회화과 출신이라고 해서 모든 시편들을 예술이나 그림으로 연결지어서 생각하려는 시도를 한다면 너무 일차원적으로 독서를 하는 것 같아서 생각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핵심적인 시어인 '밤'을 죽음으로 상정한다면 많은 부분이 해결되어버린다. 죽음에 매달려 있는 무수히 많은 글자들은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어질 것이고, '내 얼굴 위로 밤의 글자들이 쏟아져 내'리는 상황은 이전까지는 그 글자들(이름들)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사망하거나 관계가 정리된지 오래되어서 더이상 쉽게 떠올릴 수 없는 이름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밤이 너를 보고 놀란 날'이라거나 '네가 내 앞에 주저앉던 날'은 곧 잊혀질 예정이거나 관계가 정리될 예정인 사람이라고 딱 정의내려버리면 머리로는 편하지만 과연 정말로 그게 시인이 의도하고 쓴 것일까 생각해보면 아닐 것 같다.
독자의 고통
시를 읽을 때마다 항상 고통스럽다. 의미나 의도가 확연히 읽히는 시들도 있지만, 내가 읽어낸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훨씬 더 많다. 그렇다고 해설자나 평론가 한 명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그것을 정답으로 여기기에도 석연치 않다. 무엇을 의도했는지, 숨겨진 진의가 있는지는 쓴 사람만이 알 것이다. 글이 작가를 떠나는 순간 그 해설은 온전히 독자의 몫이고 서로의 해설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 글을 읽는 즐거움일 것이다.
그렇지만, 동기들과 이야기를 할 때마다 의견차이가 이렇게까지 심한 작가들은 몇 없었는데... 사실 박상순 시인의 작품들이 난해하다는 말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차라리 대놓고 이렇게 모더니즘에 걸쳐있는 경우라면 읽기에 어렵지는 않다. 김언의 『모두가 움직인다』라거나 문학과지성사 중기 시집들(200번에서 300번대), 리뉴얼 되기 전의 문학동네 시집을 돌이켜보면 난해하긴 하지만 읽을 수는 있으니까 조금은 순한 맛인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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