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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한 편 단위)

윤희상, 「명절날, 객지의 방에서」

by 감상요정 2023.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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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밤

  명절날, 객지의 방에서

 
  구두를 방으로 가져다 놓는다. 방 안에서 문을
  잠근다. 하루 종일 침대 위에 누워 있다. 책을
  읽지 않고 본다. 밖에서 웃는 소리가 들린다. 들리는
  것도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다. 소리나지 않게
  마른 빵을 먹는다. 빈 맥주병 속에 오줌을 싼다. 병의
  주둥이에서 하얀 버큼이 피어오른다. 자세히
  바라보고 있으면, 한 송이 꽃이다. 꽃은 아름답다.


고독이란 무엇인가

우선 본문에서의 객지라는 단어를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사실 타지생활, 임시숙소 이런 단어는 지금도 많이 쓰지만 객지라는 단어는 비교적 드물게 쓰이는 듯하다. 낡은 단어라고 해도 크게 이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객지라는 것은 타지에서의 임시 거처 정도의 뜻을 가진 단어인데, 다분히 단어의 느낌이 복고풍이다. 옛날 시들을 읽다가 호텔이나 모텔이라는 단어 대신 여인숙이라는 단어를 만나는 순간 만큼이나 낯선 경험이었다.
이 시를 읽다가 궁금했던 점은 왜 굳이 타지에서 지내는 거면 지내는 거지, 마른 빵도 몰래 먹고, 굳이 화장실도 가지 않고 맥주병에 볼 일을 봤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그 단서를 「198052703時15分」이라는 시의 제목에서 찾았다. '명절날'에 그것도 '객지'에서 자신의 흔적을 지워가며 침묵 속에 있는 것은 1980년 5월이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더러운 것보다 더 더러운 것

본문에서 시적 화자는 '빈 맥주병 속에 오줌을 싼다'. 오줌을 바라보고 한 송이 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꽃이 아름답다고 함으로서 최소한 이 시 본문 안에서는 오줌은 꽃이고 꽃은 아름답다고 하고 있으니 오줌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칭해도 크게 문제는 되지 않는다.
하지만 왜, 오줌을 아름다운 것이라고 명명하고 있을까. 그 이유는 아마도 1980년 5월에 오줌보다 더 더럽다고 볼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 아닐까. 더군다나 우연의 일치인지 필연인지 시인의 출생년도는 1961년이니 1980년에는 갓 스무살이 되었을 해이다. 「198052703時15分」에서 '대학생 형들은 떠나고'라 호명하는 것으로 보아 스무살이 된 해에 시인은 대학생이 아니었을 것이다.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출신이니 그럴 확률이 꽤 높아보인다. 서울예대 문창과는 재수하는 비율이 꽤나 높은 편이니까.
'명절날'임에도 불구하고 '객지'에서 보낸다는 것은 본가가 있는 광주로 돌아가지 못하는 상황을 보여준다. 태어난 곳은 전라남도 나주시 영산포라는 정보를 찾을 수 있었으나 고등학교는 광주 동신고등학교를 다녔으니 그 당시에 광주로 이사갔다고 본인은 추정하고 있다. 광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그 사건의 처절함 때문일 수도 있겠고, 일종의 죄책감이나 죄의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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