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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한 편 단위)4

박상순, 「밤이, 밤이, 밤이」 밤이, 밤이, 밤이 밤이 일어선다. 밤이 걷는다. 길고 긴 글자들을 가진 밤이 걷는다. 황혼의 글자는 바다를 건넌다. 바람의 글자는 빗속에서 태어났다. 12월의 글자는 여행가방을 꾸렸고 월요일의 글자는 별을 좋아했다. 화요일의 글자는 거짓말을 했고 수요일의 글자는 딴생각을 했고, 금요일의 글자는 목요일의 글자 뒤에 숨었다. 3층에서 태어난 글자는 토요일의 글자와 사랑에 빠졌다. 봄의 글자는 4층에서 떨어졌고 여름의 글자는 맨발로 나타났고, 낙엽들의 글자는 첫눈을 기다렸다. 시계 속의 글자는 해바라기가 되고 싶었고, 병 속의 글자는 바퀴가 되고 싶었다. 창밖의 글자는 부엌이나 침대가 되고 싶었다. 길고 긴 어둠의 끈을 가진 밤의 글자들을 품은 밤이 일어선다. 밤이 걷는다. 내 얼굴 위로 밤이 걷는다. 밤이.. 2023. 12. 8.
윤희상, 「고인돌과 함께 놀았다」 고인돌과 함께 놀았다 강화도에 갔다. 내가면 사무소에 들러 고인돌이 있는 곳을 물어보았더나, 가르쳐주었다. 선산에 갈 때처럼 고인돌이 있는 곳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참깨밭 한켠에 놓여 있는 고인돌 옆에 돗자리를 깔았다. 과일을 먹었다. 똥을 싸고, 오줌을 쌌다. 다섯 살 된 딸은 고인돌 위에서 춤을 추었다. 우리는 고인돌과 함께 놀았다. 나뭇잎 사이에서 해가 지고 있었다. 고인돌과 함께 놀 수 있을까 고인돌은 기본적으로 관광지가 될 수도 있고, 많이들 현장학습을 가는 장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점 말고도 고인돌은 오래된 것, 의미 있는 상징물, 옛것의 이미지를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다. 오랜 세월을 같은 자리에 있다보니 의미부여하는 것을 좋아하는 인간에게 의미를 부여받은 사물이 되는 것이다. 그런 고.. 2023. 3. 5.
윤희상, 「명절날, 객지의 방에서」 명절날, 객지의 방에서 구두를 방으로 가져다 놓는다. 방 안에서 문을 잠근다. 하루 종일 침대 위에 누워 있다. 책을 읽지 않고 본다. 밖에서 웃는 소리가 들린다. 들리는 것도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다. 소리나지 않게 마른 빵을 먹는다. 빈 맥주병 속에 오줌을 싼다. 병의 주둥이에서 하얀 버큼이 피어오른다. 자세히 바라보고 있으면, 한 송이 꽃이다. 꽃은 아름답다. 고독이란 무엇인가 우선 본문에서의 객지라는 단어를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사실 타지생활, 임시숙소 이런 단어는 지금도 많이 쓰지만 객지라는 단어는 비교적 드물게 쓰이는 듯하다. 낡은 단어라고 해도 크게 이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객지라는 것은 타지에서의 임시 거처 정도의 뜻을 가진 단어인데, 다분히 단어의 느낌이 복고풍이다. 옛날 시들을 읽.. 2023. 2. 26.
윤희상, 「빵은 나다」 빵은 나다 빵으로 여자를 만들었다 빵으로 남자를 만들었다 빵으로 사랑을 만들고, 빵으로 나를 만들었다 빵에서 해가 뜨고, 빵에서 해가 진다 나는 빵이다 빵은 나다 빵은 무엇인가 해당 시는 윤회상 시인의 『고인돌과 함께 놀았다』 시집의 중반부쯤 수록된 시이다. 평이한 이미지나 읽기 쉬운 단어들로 분위기를 이어나가다가 이 시편에서 갑자기 분위기가 돌변한다. 윤회상 시인은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고, 등단시인이니 시작법에 대해 딴지를 걸릴 만큼 허술한 사람은 아닐 터이다. 사실 「빵은 나다」는 어떻게 보면 재미있는 시라고 할 수 있다. 문예창작과에서 시를 전공할 때 하지 말라고 하는 것들이 전부 이루어진 시라고나 할까. 같은 단어의 과한 반복, 한 단어에서 파생되어서 암호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빵이.. 2023. 2. 23.